요즘엔 참 다양한 모임들이 있다. 취업 스터디, 독서 모임, 세미나 같은 성장을 위한 모임부터, 러닝이나 와인 동호회 같은 취미 모임, 목적이 또렷하지 않은 채 그저 모여서 서로를 위로해주는 모임까지. 분기에 한 번씩 모이는 모임부터 매주 만나는 모임까지 다양하고, 매일 아침이나 저녁마다 만나 가족보다 더 자주 보는 모임도 있다. 고립의 시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물론 이 모임들은 전통적 공동체와 다소 결이 다르다. 모임 주제 외의 관심은 경계된다. 관계는 모임 시간과 주제로 한정된다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공유된다. 모임이 끝난 뒤에 개인적으로 연락하거나 주제와 무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 된다. 그래서 혹자는 이를 '느슨한 연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현상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 최소한 그 모임 안에서는 굉장히 솔직하고 강도 높은 교류가 일어난다. 단발로 끝나지도 않는다. 적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에 걸쳐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이를 그저 가볍고 느슨하다고만 부르는건 어딘가 맞지 않는듯 하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평소에는 연락하지 않는데 만나는 그 순간에만 내밀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 지속된다는 것은 '친해져야 더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통념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의 일상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더 솔직해질 수 있다. 직장이나 가족처럼 기존의 삶과 얽혀 있지 않기에, 털어놓은 이후에 대한 불안을 잠시 접어두고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또한 이 관계의 바탕에는 동질성이 자리잡고 있는듯 하다. 다양하면서도 그 모임의 주제와 목적에 있어서는 동질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인다. 관심사만이 아니라 그 관심사를 둘러싼 삶의 단계와 긴장의 수준까지 비슷한 경우가 많다. 상대의 어려움이 내 어려움과 닮아 있을 때,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감당이 아니라 공감이 될 때 연결이 유지된다. '나도 그렇다'는 말 한마디가 위로가 된다. 이 위로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제공해서라기보다, 내가 내 감정을 다시 정렬할 수 있어서 생기는 것에 가깝다. 주는 사람은 없는데 받는 사람이 생긴다. 그래서 이 관계는 주고받음이라기보다 공명에 가깝다. 의도적 노력 없이도 무언가 오고 간다. 그렇기에 큰 부담 없이 모임이 지속된다.
이렇게 보면 이보다 더 이상적인 연결도 없어 보인다. 서로의 삶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정서적으로 지지받고, 때로는 직업적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공명에는 발상 조건이 있다. 서로의 위치와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바꿔 말하면 이 균형이 깨지는 순간 연결은 흔들린다. 정서적 공감을 위한 모임에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자주, 훨씬 깊은 우울을 꺼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점점 자리를 잃는다. 취업 모임에서도 누군가가 먼저 합격하면 그 사람의 이탈 뿐만 아니라 모임 자체가 자연스럽게 해체된다.
그래서 이런 모임은 전통적 공동체가 하던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함께할 관계를 기대하는 건 이상한 일이 된다. 수많은 모임에 참여하면서도 마음 한편의 불안을 해소하긴 어렵다. 그럼 그 모임에서 느꼈던 환대와 친밀함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나에게 상대는 '사람'이 아닌 '내 경험을 비추는 거울'로만 존재했던 것일까. 내게 위로가 되는 방식으로만 익명의 타인을 소비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방식은 진정한 공동체가 아니니 그만둬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이전에는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획득됐던 가정, 마을, 직장, 교회 같은 공동체가 상당 부분 해체됐다. 그렇다고 이를 대신할 만한 깊은 관계를 의도적으로 만들어가는 데는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 정서적 비용이 든다. 어떻게 어떻게 구성했다고 하더라도 전통적 공동체에 비해 무너지기 쉽다는 리스크를 지닌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존 공동체의 역할을 모두 대신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특정 상황과 시점에 한해서는 공동체만큼의 안정과 공감, 연대를 경험할 수 있는 관계(context-bound intimacy라고 불러야할까?)를 만들어온게 아닐까. 다른 사람의 삶을 떠안을 여유가 없는 조건에서 그나마 연결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도 일견 효과적인 선택이다.
여기서 교회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일주일에 하루 모여 서로를 환대하고 뜨겁게 찬양하고 같은 말씀을 듣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 물론 좋은 것이지만 이는 앞서 얘기한 모임에서도 유사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 교회는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동질성이 객관적 조건이 아니라 모두가 죄인이라는 너무나도 큰 사실로써 유지되는 곳. 실직해도, 병에 걸려도, 형편이 기울어도 삶의 관계가 유지되는 곳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그런 상황에 처해진 자들을 동일하게 대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물질적/정서적/상황적 필요를 직접적으로 채워주는 곳. 그런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교회 공동체 유지를 위해 이러한 만남을 지양하고 교회차원에서 선을 긋는 교회가 많아진다. 현실적이다. 하지만 그럼 왜 거기에 있는 것이 교회여야만 하는가.